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내 동년배들 중에서 한문을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축에 속했다. 한자를 읽을 줄 알다보니 자연스레 신문들도 읽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시사적인 부분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나름 대답을 능숙하게 하여 선생님들의 눈을 띠요용~ 하게 만들었다.
한문을 많이 알게 된 계기는 할아버지께서 사오신 만화책 한 권 덕분이었다. 만화책이라면 질색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왠일로 만화책을 선물해주겠다라는 말씀에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천지개벽과 같은 격한 감정의 울림을 느끼며 기꺼이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한석봉천자문 만화 학습 교본>이라니....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지만 나름 고심 끝에 손자의 학습발달을 위해 자신의 교육 기준을 과감하게 포기한 할아버지의 고뇌가 느끼며 겸허히 받아들였다.
한석봉하면 역시 어머니와의 배틀이 유명하다. 떡썰기 마스터였던 어머니와의 배틀에서 패한 한석봉은 다시 고난한 유학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효를 중시했던 조선시대에 한석봉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무리 아니었을까? 차라리 어머니가 떡집을 여는 것이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형식은 4컷 만화와 비슷한데 천자문 순서대로 진행되며 한석봉 또는 조연, 엑스트라의 대사 행동을 한 컷당 한 단어로 매치시킨다. 그래서 조금 어색한 설정들이 보이지만 천자를 한 흐름으로 이어가려는 작가의 노력은 가상하다고 인정해야할 것 같다.
인쇄 일자가 보이는가? 무려 35년이 넘은 책이다. 지금은 <마법천자문>같은 쌔끈한 만화들이 있지만 당시엔 전형적인 교양학습만화의 스타일이 전부였던 시대. 그래도 덕분에 한자를 조금 일찍 깨우치게 되었지만 일단 이것도 국어개념이 어느 정도 정립된 뒤에 자연스럽게 익혀야 학습 효과도 좋을 듯 하다.
부록으로 각종 문서 서식 예시들이 있는데 지금이야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접수해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런데 재밌는 건 신원보증서의 내용. 위의 사람은 사상이 건전하고 품행이 단정한 자를 문단이 있는데 사상의 건전함이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당시가 군사독재정권시절이었으니 사상검열의 일상화였을라나?
한석봉이 글씨로는 유명하지만 글씨에만 매진한 것인지 행정력은 영 꽝이었던 모양이다. 가평군수로 임명 되었다가 쫓겨나고 말년에는 명예롭게 은퇴한게 아니라 파직을 당한다. 사람이니 모든 것을 잘 할 수 없으니... 한석봉을 엄한 행정관리로 앉히려했던 선조의 한계라고나 할까? 여튼 예술적 경지라고 칭찬하기는 뭐하지만 반듯하고 깔끔한 글씨의 정석을 보여준 한석봉의 일화로 만들어진 <한석봉천자문 만화 학습 교본>을 통해 초딩때의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